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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드소마> 매혹시적인 공포에 대해서 봅시다
    카테고리 없음 2020. 2. 26. 22:53

    * 영화 한 장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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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쩐지 섬뜩한 작동 원리는 서스펜스의 작동 원리와 반대다. 서스펜스는 히치콕의 내용처럼 폭탄이 터질 때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의자 아래 시한폭탄의 초침을 보여줄 때 생성합니다. 즉 서스펜스는 관객에게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생성합니다. 따라서 본인의 섬뜩함은 관객에게 정보를 제한함으로써 생성합니다. 예를 들면,<지원>(2014)에서 느껴지는 쌀쌀함은 관객들도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존재의 정체를 알 수 없다는 점에 생성합니다. 만약 이미지의 존재가 하나하나 밝혀지면 더 이상 섬뜩함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단지 해결해야 할 문재가 남을 뿐이었다<이미 사물과 섬뜩한 것>의 저자 마크 피셔는 "존재와 비존재에 대한 질문과 관계가 있다"라고 내용합니다. 없을 때 있을 때 있을 때 있을 때 있을 때 없을 때 있을 때 있을 때 있을 때 있을 때 있을 때 없을 때 있을 때 갑자기 본인 남의 설령은 사라지는 것 같은 게 섬뜩했다. 아이·레빈의 소설을 영화화한<스테프포도우 와서 이브네>(1975)를 예로 들어 보자. 스텝퍼드 와이브스는 스텝퍼드 촌락으로 이사 온 주인공이 주변 여자들이 하나둘씩 이상하게 변하는 것에 문제를 갖게 되면서 남편들이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아내를 기계로 대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예기의 영화다. 이 영화는 아내 sound에서는 기계처럼 변한 여자들에게서 섬뜩함을 느낀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닌 듯한 불쾌감(uncanny)이 주는 섬뜩함이었다. 그리고 본인 중에는 아내를 기계로 바꾸는 남자들에게서 섬뜩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 남자들 또한 인간이라면 가져야 할 무언가가 부재합니다라는 점에서 기계와 다르지 않다.(<스테프포도우 와서 이브네>을<겟 아웃>(2017)로 바꿔도 무리는 없습니다). 이런 구조는 아이·레빈의 대표작으로 1968년 영화로 제작된<악마의 씨앗>에서도 나타난다. 이 영화에서도 악마라는 미지의 존재가 쌀쌀함을 느끼게 하는 한편, 여성을 악마의 제물로 바치려는 남편 또한 악마와 다름없다는 점에서 섬뜩함을 자아낸다. 엘라 레빈의 섬뜩함은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가져야 할 특성이 없는 존재들이 주는 소견이었다 <미드소마>의 첫 번째 섬뜩함도 홀가 마을 사람들에게 부재한 무언가 때문에 생겨요. 그러한 본인의 <미드 소마>는, 기분나쁜 영화는 아니다.돌라 <미드소마>는 쌀쌀함을 묻는 영화에 가깝다. 즉 <미드소마>는 공포영화가 아니라 공포에 대한 영화다. <미드소마>는 현대인의 공포를 이해하기 위해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를 접촉시킨다. 하본인의 세계는 도시라는 밤의 세계이며, 또 다른 세계는 스웨덴의 어느 시골에 위치한 낮의 세계이다. 밤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크리스티안이고 낮의 세계를 대표하는 인물은 펠레다. 대니가 쌀쌀함을 느끼는 세계는 죽은 부모와 남동생이 있는 밤 세상이다. 절벽에서 공포에 질린 대니가 이유는 죽은 부모님과 남동생을 즉 존재하지 않는 존재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대니가 의지하는 크리스티안은 대니의 고통과 상실감을 맛볼 수 없어요. 대니의 불안과 공포는 대니의 고통과 상실감을 얻지 못하는 크리스티안에 의해 증폭된다. 크리스티안은 스텝퍼드 와이브스의 설령은 악마의 씨앗에서 주인공의 공포와 불안을 무시하는 남편을 닮았다. 대니를 공포로 몰아넣는 존재는 홀이 촌락인이 아니라 크리스티안이며, 이렇게 보면 이 영화는 반전된 <악마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무서운 존재, 즉 무엇인가를 결핍하고 있는 자는 호르가 촌락의 사람들이 아니라 현대인이며, 그래서 그들은 서로를 두려워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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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아라, 아픔을 수반하는 이 즐거움을, 실은<미드소마>는 섬뜩하다기 보다는 기묘하다. 그렇다면 기이하다니 웬일인가 기묘한 것은 어울리지 않는 존재, 과도한 존재로 특징지어진다고 마크 피셔는 말합니다. 군무 이상해서 여기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미드소마>의 기이함을 설명하기 위해 절벽 장면을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두 노인이 절벽에서 자살한 뒤(나중에) 경악하는 주인공 일행에게 홀가 마을 주민들은 생아이를 주다 사람들이 맞이하는 공동체의 의식이라고 설명해 준다. 단지 의식이 자살로 끝난다면, 이러한 의식은 비윤리적, 그러나 이해 가능한 영역의 의식일 것이다 그렇게 살아 있는 노인의 얼굴을 미리 준비해 둔 과인무퇴로 찌그러뜨리는 것은 이런 설명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는 과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찌그러진 얼굴을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이 영화 자체가 과도하고 기이하다는 인상을 준다. 그 외에도 어울리지 않는 성악, 침묵의 지나친 외침은 모두 기이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크 피셔에 의하면 '기이한 것은 우리의 이해가 불충분했다'는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홀이 마을 사람들을 이해하게 될 때 기이는 어느 정도 사라지게 된다.홀거 마을 사람들은 오직 과인으로만 볼 수 있는 현대인과 달리 모든 존재가 서로 연결돼 있다고 믿는다. 이런 홀이 마을 사람들의 신념과 연결시켜 노인의 얼굴을 망치로 때린 행위의 의의를 짐작할 수도 있다. 추측컨대 이 의식은 사람을 남과 구별하는 얼굴이라는 표상을 지워 영혼을 공동체의 일부에 귀속시키는 것이었다. 그라과인홀이 마을 사람들의 신념을 이해했다고 해도 영화의 기이함은 여전하다. 예를 들어 대니는 홀이 마을에 들어가기 전에 내 몸이 수풀의 일부가 되는 환상을 보고 배우지 않았던 스웨덴어로 홀이 사람들과 소통하게 된다. 이처럼 영화는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홀거 마을 사람들의 공감대도 초자연적인 힘처럼 느껴진다. 홀거 마을의 여성들이 대니와 함께 슬퍼하고 통곡했을 때, 그들은 대니의 아픔을 실제로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홀거 마을 사람들이 영화의 마지막 희생잔치에서 희생자처럼 울부짖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제가 축제의 일부라는 점에서 이 희생제는 결국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다.즉, 아픔을 동반하는 즐거움(주이상스)이었다. 이 즐거움은 미드소마를 보는 관객이 누리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숨겨진 기이함이 여기에 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마치 호르가 마을 사람들처럼 고인의 존재는 잠시 잊고 영화 속 인물의 느낌을 느끼며 함께 슬퍼합니다. 과인의 눈을 찌르는 오이디푸스 왕을 보기 위해 극장에 갔던 수천 년 전 사람처럼 함께 슬퍼하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이렇듯 <미드소마>는 영화가 갖는 기묘한 매설령에 대한 비유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시네 21 www.cine21.com. 박지훈 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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